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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곳에 가재와 굼벵이가 서로 이웃해서 살았다. 그런데 가재는 수염이 있는 대신 눈이 없고, 굼벵이는 눈이 있는 대신 수염이 없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이 위엄 있는 수염, 어험.”, “이 밝은 눈은 어떻고?”하며, 서로 제 것을 자랑했지만, 가재는 굼벵이의 밝은 눈이 탐났고, 굼벵이는 가재의 위엄 있는 수염이 부러웠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들은 그 수염과 눈을 바꾸기로 했다. 먼저 굼벵이가 제 눈을 빼서 가재에게 주었다. 가재가 굼벵이의 밝은 눈을 받아 달고 보니, 세상은 더 없이 환하고, 저의 수염은 더욱더 위엄 있게 보였다. 그래서 가재는 저의 그 위엄 있는 수염을 굼벵이에게 줄 생각이 없어졌다. 굼벵이는 가재가 그 수염을 선뜻 내주지 않자, “왜 이렇게 꾸물대는가?”하고 다그쳤다. 그러자 가재는 “눈도 없는 놈이 수염은 달아서 무얼 해?”하고는 그냥 가 버렸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 본 개미는 굼벵이의 하는 짓과 그 당하는 꼴이 너무도 우스워서, 그만 웃고웃고 하다가 허리가 잘룩해졌다.

가재와 굼벵이 이야기를 듣고 이쯤 생각하는데, 어디선지 자지러지게 웃어대는 개미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순간 얄미운 생각이 번뜻 들었다. 아니 괘씸했다. 굼벵이의 무지와 경박(輕薄)은 허리가 끊어지게 웃어대는 놈이 어찌하여 가재의 배신과 모순에 대해선 일언반구(一言半句) 말이 없는가? 더구나 배신과 모순은 부도덕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데도 말은 고사하고 손가락질 한 번이 없다. 그렇다면 개미란 놈은 왜 그토록 편파적(偏頗的)이었을까? 굼벵이의 무지와 경박이 하도 우습다 보니, 가재의 배신과 모순은 미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약간의 상상을 보태 보자. 만일 굼벵이에게 예민한 촉각과 날카로운 이빨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럴 때도 개미란 놈이 그토록 편파적일 수 있었을까? 굼벵이는 처음부터 개미가 두려워할 만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이제는 눈까지 없다. 그러므로 백 번 웃어 주어도 보복 당할 염려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재는 그렇지 않다. 옆걸음을 쳐도 개미보다는 빠르고, 이제는 밝은 눈까지 달았으니 숨을 수도 없다. 잘못 보였다가는 언제 그 예리한 집게발에 허리가 잘릴지 모른다. 개미는 이런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굼벵이의 무지와 경박을 비웃으려는 게 아니었다. 가재의 배신과 모순을 질타(叱咤)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다소 그런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개미의 간악한 편파성을 꾸짖자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개미는 가재의 잘못을 질타했어야 한다. 보복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다면, 굼벵이의 어리석음도 비웃지 말았어야 한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제는 더 꾸짖을 용기가 나질 않는다. 아니, 앞에서 몇 마디 꾸짖은 것도 오히려 취소하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 개미란 놈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있다. “이봐요, 정 선생. 내가 당신에게 보복할 만한 힘이 없다고 해서, 이렇게 나를 매도하는 거요? 호랑이가 나처럼 했어도 이럴 거요?”

내 발이 저리니 어떻게 더 개미를 꾸짖겠는가?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는 옛말이 있다. 내가 개미를 꾸짖은 말이 나를 꾸짖는 말로 돌아오다니, 참으로 말의 어려움을 알겠다. 그럼 어찌할까? 호랑이를 꾸짖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까지는 꾸짖는 일을 삼갈 수밖에 없다.


PythonPowered EditText of this page (last modified 2004-01-20 23: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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