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Ⅱ. 윤리에 대한 기본적 물음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는데 있어 그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행위인지 또는 어떤 사람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앞의 주제Ⅰ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그것은 판단자의 철학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주제에서는 어떤 행위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려 이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물음들이 무엇인지와 그 물음들에 대해 어떤 대답들이 주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하고자한다.

1. 바람직한 행위 선택의 두 가지 조건

우리 삶의 모습은 크고 작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이런 선택들을 잘해나가는 것은 삶 을 풍요롭게 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요즘 우리사회에서는 선택의 잘못으로 평생 동안 쌓아올린 공든 탑을 무너트리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면 어떤 선택이 잘한 선택이고 바람직한 선택일까? 남의 이익보다는 자기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있어서 그의 선택이 바람직한 것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첫째, 선택된 행위가 자신의 이익(가치, 좋음, 선)을 잘 증진시킬 수 있어야 하며, 둘째, 그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직업을 고르려고 하는데, A직업은 200, B직업은 150, C직업은 120, D직업은 100의 이익을 그에게 주며 이중 A, D는 정당하지 못한 직업이고, B, C는 정당한 직업이라면 그는 이중 B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바람직한 행위가 갖추어야 할 이 두 조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바이다. 문제는 어떤 행위가 자기 이익을 잘 증진 시켜주며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한지 판단하는 것이 때로는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람직한 행위의 이 두 조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으므로 사람들은 “과연 어떤 행위가 나의 이익을 잘 증진 시킬 수 있는가?”와 같은, 그리고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인가”와 같은 물음을 묻게 된다. 그리고 이런 두 종류의 물음이 바로 윤리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물음이다. 그것은 윤리의 궁극적 지향이 무엇보다 사람들의 삶을 바람직하고 잘 사는 삶이 되게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중 전자의 물음은 좀더 분석 될 수 있다. 어떤 행위가 자기의 이익을 잘 증진시킬 것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이 틀리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핵심적은 이유 중 하나는 무엇이 자기에게 진정하게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틀렸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흔히 피상적으로나 말초적으로만 좋은 것을 진정하게 좋은 것으로 착각하여 이를 쫒다가 진정하게 좋은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윤리에서는 전자의 물음을 대신하여 자주 “자기(또는 인간)에게 진정하게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란 물음이 던져진다. 그런데 이런 물음들에 대한 답을 알고 있어도 사람들은 바람직한 행위를 선택하는데 망설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람직한 선택은 따로 자기 이익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앞의 예에서만 보아도 바람직한 행위B를 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A를 선택하는 것에 비해 20의 이익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처했을 때 “왜,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다고 해서 내 이익을 더 증진시킬 수 있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한마디로 “왜, 나는 도덕적이어야 하는가”하고 묻는 것이며, 이 물음에 대해 긍정적인 답을 찾지 못할 때 자기 이익의 최대화를 위해서 바람직한 행위를 선택하기를 포기하게 된다. 따라서 윤리는 이 물음에 대해서도 답을 해주어야 한다.

2.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요즘처럼 가치관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때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6,70대의 6.25를 경험한 세대에게는 더 할 것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문화적 변화와 전통 가치관의 붕괴로 개인주의적 가치와 공동체 주의적 가치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특히 ‘편리함’ ‘풍족함’과 같은 물질적 가치와 ‘구도’ ‘헌신’ ‘진리’와 같은 정신적 가치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혼란을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에도 실제로는 물질적 가치 추구에 주력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마음 한편으로는 물질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것에 대해 꺼림직 하게 느끼고, 무언가 중요한 것을 상실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비해 지금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은 훨씬 더 분명 해졌다. 개인주의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의 유행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물질적 가치를 이제는 더 이상 거리낌이 없이 가장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점은 의료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어 소위 ‘메이저’과로 불리는 전문과들 보다는 의료적 중요성은 떨어지지만 수입이 많은 ‘마이너’과에 전공의 지원이 몰리는 현상은 이전부터 벌어졌지만, 그래도 ‘메이저’과에 종사하는 의사들의 자부심이 더 컸던 반면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다고 한다.
이런 변화는 물질적 가치가 그 자체의 특성상 본래 정신적 가치보다 더 우월한 가치라면 매우 긍정적인 변화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제 전통사회에서의 허위의식에서 벗어나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졌으며 그러므로써 진정한 가치관을 확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래는 물질적 가치보다 더 우월한 정신적 가치들이 많이 있는 것이라면 이런 변화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더 우월한 가치들을 상실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런 상실을 깨닫지 조차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차라리 이전처럼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는 상태가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 중에서 더 중요한 가치는 과연 어떤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정신적 가치가 더 소중한 것이다”는 답이 나올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정신적 가치추구에도 힘을 기울이면 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신적 가치를 열심히 추구해 보지 않는 이상 이 물음에 대해 답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정신적 가치가 힘을 기울여 추구할 만한 기치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정신적 가치를 추구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낮은 질의 가치는 통속적인 음악처럼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지만 높은 질의 가치는 오랫동안 지겹고 힘든 훈련을 쌓아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고급음악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고급의 가치를 채 느껴보기도 전에 그 추구과정이 힘든 것만 보고, 이런 추구를 고통스러운 것, 어리석은 것, 자기를 희생하는 것으로만 간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고급의 가치를 느껴 본 사람은 주저 없이 이 고급의 가치를 더 소중한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편리함’과 ‘풍족함’과 같은 물질적 가치는 접하기만 하면 쉽게 느낄 수 있어서 그것이 얼마만한 가치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신적 가치의 경우 처음에 접했을 때 느껴지는 지겨움이나 힘겨움을 넘어섰을 때 얼마나 깊은 만족이나 가치감을 줄 수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 따라서 어떤 것이 더 우월하고 진정한 가치인지 판별 할 수 있으려면 정신적 가치에 대해 접근해 보려는 상당한 정도의 탐색이 필요하다. 가령 의사직은 흔히 사람들이 ‘의사가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떠올리는 가치들만 제공 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닐지 모른다. 진지한 모색의 자세로 임하는 의사에게는 훨씬 깊고 차원 높은 가치의 지평을 열어 보이는 것이 의사라는 직업일 수 있는 것이다.

3. 행위의 도덕적 정당성

윤리의 세 가지 기본 물음 중에서도 윤리학자의 논의가 집중되었던 것은 바로 어떤 행위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래서 ‘윤리’라는 말은 바로 이 물음과만 연관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덕적 정당성’의 의미가 무엇이고, 이 개념이 ‘옮음/그름’ ‘의무’ 등 다른 도덕 개념들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가. 도덕적 개념들의 구분

다음의 행위들을 ‘옳음/그름’ ‘정당성’ ‘의무’ 등의 도덕적 개념을 사용하여 구분해 보자.
(1) 당직이 아닌 일요일에 야구장에 가는 행위
(2) 무료로 의료봉사는 하는 행위
(3) 병원수입 만큼 세금을 내는 행위
(4) 환자소개비를 주고 교통사고 환자를 유치하는 행위
이 행위들은 도덕적 개념들의 일상용법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될 것이다.

(1) (2) (3) (4)

해야 할 의무도, 하지 말아야
할 의무도 없는 행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행위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는 행위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행위
도덕적으로 정당화
되지 않는 행위
(용법1) 옳은 행위
(용법1) 그른 행위
(용법2) 옳지도,
그르지도 않은 행위
(용법2) 옳은 행위
(용법2) 그른 행위

위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화 된다는 것은 그 행위를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그르지 않다”는 것을, 즉 그 행위를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용납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의무개념과 관련시켜 본다면,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은 그 행위가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거나 하지 말아야 할 의무를 어기지 않는 행위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때 그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정당화 되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와 동일시 할 수 있는가는 이때의 ‘옳다’란 용어를 어떤 의미로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즉 ‘옳다’란 용어는 일상적으로 두 가지 용법을 갖고 있는데, 첫째, 우리가 행위들을 옳은 행위, 그른 행위로 이분할 때의 용법이 있다. 이때는 그르지 않은 행위는 모두 옳은 행위가 된다. 둘째, 행위를 옳은 행위, 옳지도 그리지도 않은 행위, 그른 행위로 삼분할 때의 용법이 있다. 이때는 그르지 않은 행위라고 해서 모두 옳은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휴일 날 야구장에 갔다고 하여 “옳은 행위를 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색한 것은 이때의 ‘옳음’이 후자의 용법으로 쓰여 졌기 때문이며, 동생을 때린 아이에 대해 부모가 “동생을 때리는 것이 옳은 일이니”라고 꾸짖을 때 ‘옳음’은 전자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행위는 전자의 용법에서는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와 동일시 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의 용법에서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거나 도덕적으로 옳지도 그르지도 않은 행위가 된다. 따라서 이중 어느 용법에서든 상관없이 할 수 있는 말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행위란 도덕적으로 그르지 않은 행위이다”라는 말이다.

나. 의무적인 행위와 의무이상의 도덕적 행위

앞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도덕적으로 탁월한 행위는 의무로서의 도덕적 행위와 구분이 된다. 의무인 행위는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나 한 사회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최소한의 기본 행위로서 이런 행위조차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서로 비난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본행위를 넘어서 있는 도덕적 행위는 하면 훌륭하지만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서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이런 두 종류의 행위를 구분하지 않아서 서로에게 지나친 도덕적 강요를 하는 경우가 우리사회에서 종종 발생한다. 예를 들어 우리사회의 일부 구성원들은 의사에게 지나친 도덕적 부담을 지우는 다음과 같은 논변을 펼칠 때가 있다.

전제1 ; 허준처럼 헌신적인 의술활동을 벌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이다.
전제2 ; 옳은 행위를 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이다.
결론 ; 그러므로 모든 의사들은 허준처럼 헌신적인 의술활동을 행해야 한다.

이 논변은 전제2가 거짓이다. 옳은 행위에는 의무인 행위뿐만 아니라 의무 이상의 도덕적 행위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제중 하나가 거짓임으로 이 논변은 건전하지 못하고, 따라서 결론이 참이라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이렇게 의사들에게 지나치게 높은 도덕적 의무를 씌우는 것은 반박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반박에 있어서 주의 할 것이 있다. 일부 의사들은 “허준처럼 헌신적인 의료 활동을 하는 것은 각 의사의 선택에 맡겨야 하지, 절대 강요 할 수는 없다”는 것에서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든 의사는 의료행위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를 그의 자유에 의해 선택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이것은 의사의 최소한의 의무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오류이다. 헌신적인 의료 활동이 모든 의사의 의무는 아니지만 ‘응급환자 치료’처럼 모든 의사에게 의무인 의료행위 또한 분명히 있는 것이다.

다. 올바른 도덕적 정당성 판단의 조건

어떤 해위가 도덕적으로 정당 한가 아닌가 하는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방법과 절차에는 여러 가지가 제시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절차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행위가 발생하는 상황, 그 행위의 특성 등에 대한 여러 사실들을 파악 한다 (사실판 단)
2) 그 상황이나 행위에 적용될 수 있는 도덕적 기준을 떠 올린다 (도덕적 기준 찾기)
3) 이 사실 판단과 도덕적 기준을 전제로 삼아 그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을 결론으 로 이끌어 낸다.

이런 절차에 비추어 보았을 때 특정행위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판단이 올바르기 위해서 찾아야 할 조건을 알 수 있다. 우선, 문제되는 상황이나 행위에 대한 사실판단이 정확해야 한다. 실제로 같은 행위에 대해 사람들의 사실판단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행위에 대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2000년 의사 폐업당시 폐업지지자들 중 상당수는 “의사폐업이 당장에는 아닐지라도 장기적으로 국민들의 건강보호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서 이 폐업이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폐업반대자들은 “이 폐업은 장기적으로 보아 서로 국민들의 건강보호에 큰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없다”고 반박했었다. 이 경우 사실 판단이 정확한 측의 정당성 판단이 옳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둘째, 도덕적 정당성 판단에 사용하는 도덕기준이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사실 판단이 정확하더라고 여기에 적용시키는 도덕기준이 올바른 것이 아닐 때 이런 기준에 입각한 정당성 판단은 그른 것이 된다. 예를 들어 히틀러는 상황판단을 정확히 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숭고한 게르만 민족을 위해 다른 민족들이 희생당하는 것은 정당화 된다”와 같은 그릇된 도덕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태인을 학살하는 것은 정당화 된다”와 같은 극도로 잘못된 도덕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라. 도덕적 정당성의 올바른 기준

도덕적 정당성 판단이 올바르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두 조건 중 정확한 사실 판단은,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등에서 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현상을 객관적이고 철저하게 탐구해 나갈 때 가능할 것이다. 이에 대해 도덕적 정당성의 올바른 기준을 찾아내는 것은 철학적 ․ 윤리학적 논의와 탐구를 요하는 것인데, 문제는 앞의 주제Ⅰ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행위의 정당성 여부를 그 결과에서 찾는, 공리주의와 같은 결과주의(결과론), 결과와 상관없이 행위자체의 특성 때문에 그 행위가 정당하거나 정당하지 않게 된다고 보는 의무주의(의무론) 등 도덕적 정당성의 기준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입장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각 개인이 충분한 숙고를 거쳐 취한 입장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서로 인정해 주는 길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더 설득력 있는 입장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그러면 이들의 입장을 중심으로 도덕적 정당성의 올바른 기준을 파악해 보자.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도덕은 ‘남의 입장에서 봄’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처럼 우선은 자기의 입장에만 서서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렇게 자기 입장에만 설 때 그에게는 자기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것만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그가 자기 아닌 남의 입장에도 서보았을 때 그는 남의 이익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이익증진을 바라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행위의 도덕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관할 수 있다. 그 직관에 의하면 행위의 도덕성이란 행위자가 자기의 입장뿐만 아니라 남의 입장에도 서보았을 때 그 행위가 갖게 되는 “남의 이익도 자기의 이익과 마찬가지로 증진시킴”이라는 특성이라고 일단 말할 수 있다. 이 직관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도덕관념과 부합하는데, 이는 이 직관이 타당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상적인 도덕적 담론에서 사람들이 상대를 도덕적으로 설득시키는데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논변이 바로 “너도 그 입장이 되어 봐”,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봐”와 같은 다른 입장에서 보기(역지사지/易地思之)를 요구하는 말이다. 또한 동서양 모두에서 도덕적 규범의 핵심으로 간주되어 온 것은 ‘황금률(Golden Rule)’인데 이 황금률도 기본적으로 이 ‘입장에서 보기’에 기반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내가 그 입장에서 보아야 할 ‘남’은 내 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모든 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은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인 ‘인맥따지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적인 일을 행하고 있음에도 혈연, 지연, 학연 등을 따져서 자기와 같은 인맥에 속하는 사람에게 특혜를 주는 행위자는 분명 자기를 벗어나 남의 입장에도 서서 그 남의 이익도 증진시켜 주려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결코 정당화 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자기와 같은 인맥에 속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만 서보았을 뿐, 그 인맥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는 서보지 않음으로써 결국 같은 인맥의 사람들에게 특혜를 준만큼 그 인맥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억울한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행위의 도덕성이란 관련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동등하게 배려하면서 행위를 할 때 그 행위가 갖게 되는 특성을 의미한다. 행위는 이런 도덕성을 완전한 형태로 가질 수도 있고 불완전한 형태로 가질 수도 있다. 이 중 전자의 경우 나와 남을 완전히 동등하게 보는 것으로 이때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행위’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 중에는 이런 도덕적으로 완전한 행위를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며 칭송 받을 만한 일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렇게 도덕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행위는 당연히 정당화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추구만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완전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행위자는 자신의 이익을 다른 모든 관련자들의 각각의 이익과 동등한 비중만을 갖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도덕적 완전성의 추구는 자기 이익의 증진과 크게 상반될 때가 많다.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각각 자기의 이익과 똑같이 소중하게 여기게 되면 자기의 이익을 늘릴 수 있는 여지는 대폭 감소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가 가진 대부분의 재산을 당장 헐벗고 굶주린 이웃이나 빈곤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그가 원하는 풍족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도덕적 완전성의 추구와 자기 이익의 추구가 상반되므로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두어야 할지가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한 기존의 대표적인 두 입장은 모두 극단적인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인간은 도덕적 완전성을 추구할 필요 없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면 된다는 입장으로 ‘자기 이익 절대주의’라고 부를 만한 것이고, 또 다른 입장은 인간은 자기 이익의 추구를 극복하고 도덕적 완성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도덕적 완전주의’라고 부를만한 것이다.
하지만 자기 이익의 추구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의 동기라는 점에서, 도덕 완성의 추구는 행위 정당성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둘 다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두 상반된 추구를 통합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도덕성을 추구하되 자기 이익 추구의 여지도 남도록 불완전하게 도덕성을 추구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즉 자기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할 수 있되 그것을 다른 관련자들의 이익 추구를 크게 침해하지 않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해야 하고, 다른 관련자들의 이익을 추구하되 자기 이익 추구를 일정정도 이상으로 제약하지 않는 추구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그 이상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해서는 안 될 행위는 바로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는 행위”가 되며, ‘다른 관련자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행위 중 반드시 해야 할 최소한의 행위’는 바로 ‘해야 할 의무가 있는 행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는 행위자 자신의 이익에 대한 배려보다는 못하지만 다른 모든 관련자들의 이익도 일정정도 이상 배려할 때 그 행위가 정당화 된다.’는 것이 도덕적 정당성의 기준이 될 것이다.

4. 왜, 도덕적 행위를 하여야 하는가?

사람들은 행위를 할 때 선택 가능한 여러 행위 중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가 어떤 것인지 잘 판단되지 않아 갈등을 느낄 때가 많다. 앞의 논의는 바로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경우에도 갈등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것은 그 정당한 행위를 하는 것이 정당하지 못한 다른 행위를 하는 것보다도 자기 이익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직종에 비해 의사는 특히 후자의 갈등을 느끼기 쉬운 상황에 많이 처하게 된다. 그것은 의료행위가 매우 복잡하고 전문적이어서 의사가 의도하기만 한다면 ‘과잉진료’ ‘방어진료’처럼 환자의 이익보다는 의사자신의 이익만을 지나치게 배려하는 행위를 해도 적발될 위험이 거의 없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사는 누구보다도 “왜, 나의이익이 감소됨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도덕적 행위가 우선 보기에는 자기이익을 감소시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이익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손님을 속여 높은 값을 받는 상인은 당장에는 정직한 상인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지만 장기적으로는 신용을 잃어 정직한 상인에 비해 적은 이익을 얻는데 그친다. 그리고 환자에게 최선의 진료만하고, 부당한 진료비를 청구하지 않고, 정확하게 세금신고를 하는 의사는 그렇지 않은 의사에 비해 그만큼 수입이 감소해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그가 스스로에게 느끼는 만족감과 자부심은 이런 손해를 충당하고도 남는다.
이런 대답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자기이익과 정당한 행위사이에 갈등이 있어 보였던 많은 경우들에 적용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비록 처음 보기보다는 적을지라도 자기이익과 정당한 행위사이의 갈등이 결코 해소되지 않는 경우들도 분명히 있어 보인다. 우리 주위에는 그가 행한 나쁜 짓 덕분에 한평생을 즐기면서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왜, 자기이익이 감소됨에도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자기이익만을 추구하는 것보다 정당한 행위를 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의 실상과 더 부합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자기와 남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다른 존재들로 보기 때문에 자기 입장에만 서서 자기이익만을 배려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간주하나, 실제로 자기와 남의 입장에도 서서 그들의 이익도 배려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이런 대답은 적어도 가족에 대해서는 옳다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족에 대해서는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기꺼이 그 이익을 증진시켜주려고 하는데, 이는 가족과 자기는 혈연적으로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족을 넘어선 다른 남들은 존재론적으로 보았을 때 나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많은 철학자들이 오랜 숙고를 거쳐 도달한 결론은 “고립된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은 하나이며 그 절대적인 하나가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고등종교 역시 비슷한 주장을 한다. 기독교의 경우 모든 인간은 신의 특별한 피조물인 점에서 같으며 그래서 신의 품안에서는 모두가 형제요 자매라고 본다. 힌두교에서는 각 개인(아트만)을 대양에서 튄 물방울들로 비유한다. 그 물방울들은 곧 하나의 궁극적 전재(브리만)와 합쳐질, 그 분신들인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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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의 상식적 개념을 의료윤리에 적용할 때 “의료윤리란 의료 종사자로서 마땅히 따라야 할 도리”라고 말 할 수 있다. 여기서 ‘마땅히 따라야 할 도리’가 무엇인가를 학문적으로 더욱 깊이 추구한다면 그 해답은 철학하는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임신중절의 문제가 현안문제로 제기될 때 가톨릭교도로서의 의사와 무종교인으로서의 의사 사이에는 그 해결방안에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전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임신중절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며, 후자는 부부합의에 의한 요청이 있을 때에는 가능한 한 임신중절을 허용하는 입장을 취할 것이다. 이 경우에 전자는 은연중 선험론적 입장을 따르게 되고 후자는 부지부식 간에 경험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인간의 생명은 신에 의하여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말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후자는 인간의 생명은 부부의 성교됨에 의해서 경험적으로 잉태되는 것이기 때문에 관계 당사자들의 삶의 보존 향상에 저해가 될 때에는 중절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의료윤리에 있어서도 윤리적 판단과 행동에는 윤리적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을 뒷받침하는 원칙이 있으며, 그 원칙은 다시 윤리이론에 바탕하게 되는 것이다. 위의 사례에서 “임신중절은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톨릭적 의료윤리 규칙이라면, “인간의 생명에 신이 부여한 존엄성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은 가톨릭적 의료윤리 원칙에 해당되며, 이 원칙은 다시 의무 주의적 윤리이론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것이다. 철학을 향내적 철학과 향외적 철학으로 구분할 수 있거니와 의무주의와 실존주의는 전자에, 공리주의와 실용주의는 후자에 각각 해당된다. 향내적 철학은 양심 또는 실존성과 같은 인간의 내면세계, 정신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대하여 향외적 철학은 쾌락 또는 실용성과 같은 인간의 외면세계, 육체적 측면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접어들면서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을 지양하고 정신과 육신의 불가분의 관계성을 더욱 중요시하게 되었다. 의료 활동에 있어서도 인간의 내면세계와 외면세를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의료윤리에 있어서도 양심 또는 실존성을 중요시하는 향내적 철학의 입장에서 제시하는 윤리의 개념과 쾌락 또는 실용성을 역설하는 향외적 철학의 입장에서 제시하는 윤리의 개념을 아울러 수용하면서 조화로운 윤리개념을 모색함으로써 바람직한 의료윤리의 개념이 정립될 것이다.

1. 의료윤리학의 정의와 목적

의료윤리는 윤리학의 한 분과이다. 이 세상에 윤리와 관련이 안 된 분야는 없다. 따라서 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는 그 분야에 적용되는 독특한 윤리문제가 있고 그 독특한 윤리문제를 연구하는 윤리학 분과가 발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업윤리, 군사윤리, 과학윤리, 교육윤리, 경찰윤리, 종교윤리 등등이 그 좋은 예이다. 그렇다면 의료분야에도 지키지 않으면 사회가 유지되기 어려운 그러한 윤리규범이 있는가? 그 대답은 “그렇다. 엄청나게 많다”이다. 윤리문제는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집단에 영향을 끼칠 때 발생하고, 그 영향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해답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분야가 윤리학 분야이다. 의료분야에서는 기본적으로 의사가 환자에게 또는 다른 의료요원들에게 여러 형태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 영향은 종종 대단히 긴급하고, 중요하며 다양하다. 뿐만 아니라, 급속히 발전되어 가고 있는 의학지식과 기술을 실제로 적용할 때 우리가 당면해 본적도 상상해 본적도 없는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의료윤리학 분야는 윤리학 분야 중 가장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분야의 하나이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의사들이 의료윤리를 배워야 하는 이유 몇 가지를 정해 보겠다.

2. 의료윤리학은 왜 배워야 하나 ?

첫째, 과거에 의료인이 사회에서 가장 교육을 많이 받고 존경을 받던 시대에는, 의사가 환자에 대해 어떠한 행동을 해도 그 행동은 환자를 위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아무도 비판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런 시대의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가부장적인 관계’라고 했다. 의사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아들과 같은 환자에게 나쁘게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민의식과 인권의식이 향상되고, 교육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그간 의료인이 환자에게 해 온 행동들에는 많은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환자에 대한 의사의 행동에 많은 윤리적인 비판을 하게 되었다. 환자의 권리장전이 그 좋은 예이다. 또한 이러한 비판의 대부분은 윤리학적인 측면에서도 타당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고 의료계 자체에서도 반성을 하게 됨으로써 의과대학에서 이러한 윤리문제에 대해 학생들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둘째, 의과대학생들은 누구나 장차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다. 한때, 훌륭한 의사란 가장 발전된 전문지식과 기술을 갖춘 사람으로 인식되어 왔다. 현재 의과대학의 교과과정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전문지식과 기술을 환자에게 적용하는 과정에는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요인들이 개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환자의 생명관, 종교관, 삶의 의욕, 의사와 환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 환자의 사회적 위상, 의료에 대한 인식, 가족관계, 교육수준, 경제수준 등 수많은 요인들이 개재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진료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이다. 따라서 의사가 이러한 요인들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진료도 잘 안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윤리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의학지식과 기술에 더하여 윤리적으로 훌륭해야 온전한 진료를 할 수 있고 동시에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이다.
셋째, 의학은 어느 분야보다도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분야의 하나다. 의학의 발전에 따라 과거에는 치료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질병을 치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또한 새로운 진단 및 치료법들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진단 및 치료법은 환자의 진료에는 도움이 되지만 그 진료방법을 적용하는 과정에 또한 진료 후에 이때까지 당면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윤리문제들이 야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시험관 아기, 태아의 성감별 능력의 발전, 생명의 복제 등은 심각한 새로운 윤리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의사들은 항상 의학의 발전과 관련하여 발생하거나 발생할 수 있는 윤리문제에 대한 이해와 예민한 관심을 가질 마음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넷째, 의료가 국가적인 관심사가 되면서 정부는 여러 의료제도를 새롭게 만들거나 정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건강보험의 통합, 의약분업, 의료전달체계, 선택 진료 등이 최근 정부에 의하여 새롭게 제안된 의료관련제도이다. 이러한 의료제도는 의료인은 물론 국민 전체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 정부가 국민에게 보건과 의료와 관련하여 어떤 형태든지 영향을 끼칠 때 여러 가지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또한 의료제도에 대한 의료인들의 반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제도나 행동들에는 깊이 숙고해야 할 심각한 윤리문제들이 개재되어 있다.
다섯째, 의사들이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윤리문제에 당면하게 되고 이러한 당면문제에 대해 윤리학자들에게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심한 기형을 가진 아기를 살릴 것인가?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 언제 호흡기를 제거할 것인가? 이식할 장기보다 이식을 원하는 사람이 많을 때 누구에게 장기 이식을 해주어야 하는가? 과연 의권의 쟁취를 위해 의사가 환자의 곁을 떠나도 되는가? 등 많은 윤리적인 해답을 필요로 하고 있다.
여섯째, 의학의 급속한 발전에는 직접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간 의학자들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의학적인 연구는 인류 다수를 위한 것임으로 실험대상자들의 약간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서도 그간 학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훌륭한 의학자가 되기 위해서 의학 연구와 관련하여 어떤 윤리적인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한다.

3. 의료에서 의료윤리학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의과대학생이나 의사들은, 의료에서 의료윤리는 특수한 경우나 몇몇 특수한 일에 관련된 의사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며, 보편적인 의사들에게는 별로 필요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한의과 대학생이나 한의사들에게 더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한의학의 진료는 검사나 수술 등과 같은 기기를 이용한다든지 화학적 약물을 투여하는 행위가 아니고 천연약물인 본초나 안마 ․ 침구 등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한의학의 의료형태도 과학적 기기진단이나 치료 술 또한 다양화 되고 있기 때문에 과거 생각지 않은 많은 윤리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의료윤리는 한 ․ 양 의사들을 막론하고 의사들의 일상적인 의료행위에 깊이 관련되어 있고 의료행위를 하는 한 의료윤리 문제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세월이 갈수록 의료윤리의 의료에 대한 영향은 점점 커가며 또한 그 중요성은 더해가고 있다. 우선 의료는 의료제도에 의하여 크게 영향을 받는다. 한나라의 의료제도를 형성하는 기본이념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나라의 의료제도가 결정되고 의료제도에 따라 의료행위의 양상이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의료제도를 구축하는 기본이념은 윤리학의 기본대상이 된다. 우리나라 의료제도 형성의 기본이념은, 모든 국민이 필요할 때 의료를 받을 권리와 사회정의에 입각한 의료분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기본이념에 따라 사회보험 형태의 건강보험제도, 의료전달체계, 의료수가의 통제, 진료거부금지, 선택 진료의 규제, 일정률의 일반병실의 확보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제도가 수립되었고 의료는 이에 따라 수많은 규제와 영향을 받고 있다. 의료인과 환자의 관계에 대한 윤리적 비판에 따라 과거의 가부장적 관계에서 계약관계 또한 봉사관계로 변함에 따라 의사나 병원이 환자에게 대하는 태도, 사용하는 언어, 설명의 의무, 승낙의 의무, 사생활의 비밀유지 등 진료과정에서 의사가 전보다 다른 새로운 의무를 지게 되었고, 환자는 이것을 권리로 주장하고 있다. 병원들이 환자중심 병원, 친절한 병원 운동을 하는 것도 의료체계가 새롭게 지게 된 의무에 의한 것이다. 의사는 윤리적으로 가장 최신지식과 기술을 항상 습득하여 환자진료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러한 윤리적인 요구를 의사들은 보수교육을 받아야 할 의무를 지게 되었고, 의료사고가 났을 때 의사가 최신지식과 기술을 적용하여 환자를 진료하였는지, 또한 환자진료를 위하여 최선을 다했는지가 법적 판결의 기준이 되고 있다. 의사의 의료행위의 선택자체에 의학지식과 기술보다는 윤리적인 판단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많다. 인공임신중절, 안락사, 인공호흡기의 제거, 기형어린이에 대한 진료, 뇌사, 약의 선택, 진료방법의 선택 등등에 의학적인 지식과 기술에 의한 판단보다는 윤리적 판단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의학에서 발전시킨 새로운 획기적인 의학지식과 기술의 적용여부에 윤리적인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효과적인 임신중절 약의 사용, 대리모, 유전자 재조합, 태아의 성감별, 생명복제 등등은 의학의 발전에 힘입은 획기적인 기술이지만, 이 기술을 실제로 사용하거나 적용 할 것인가의 결정여부에는 윤리학적인 판단이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의학 또한 의학연구 자체의 발전방향 및 연구방법의 선택에도 윤리적인 판단이 크게 작용한다. 세계 각국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인간 생명의 복제를 위해서 생명을 복제하는 기술을 연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연구에서 환자와 대조군의 선택, 연구기간, 그리고 중간결과의 평가 등에 대해서도 윤리학적인 기준이 절대적으로 적용된다.
이와 같이 의사의 진료에 의료윤리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게 관련되어 있어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4. 의료윤리 영역에 포함되는 주제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의료윤리 영역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 할 수 있는데, 첫째는 인간관계 윤리이고, 둘째는 생명과 관련된 윤리이고, 셋째는 의료분배와 관련된 윤리이다.

가. 인간관계 윤리

인간관계 윤리에는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 의사와 다른 의료요원과의 관계, 의학자와 연구대상자와의 관계, 환자와 환자와의 관계, 그리고 환자와 그 가족과의 관계 등 여러 다양한 내용들이 있다.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는 환자의 권리장전으로 대변되는 여러 가지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 의사와 같은 전문직이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윤리문제에는 권위의식과 특권의식이 있다. 이는 의사들이 남보다 교육을 많이 받았고 의업은 고귀한 직업이기 때문에 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또 하나는,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서 의사는 환자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사실이다. 의사와 환자와의 사이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윤리문제는 위의 두 가지 의식과 유리한 위치로 환자에게 부당한 영향을 끼칠 때 발생한다. 환자 권리장전에는 관심과 존중을 받을 권리, 인간으로서 존경과 대우를 받을 권리, 사생활과 육체적인 비밀을 보장받을 권리, 설명을 듣고 승낙 할 권리, 자기의 질병에 대한 진실을 설명들을 권리, 그리고 진료비에 대해 설명을 들을 권리 등이 있다. 환자의 주장은 너무도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들이 그간 병의원에서 의사를 통해 침해되고 유린되는 경우가 많았다. 의료인과 다른 의료요원과의 관계에서 발생 할 수 있는 문제는 의료인들이 유리한 입장에서 다른 의료요원을 착취하거나 사사로운 요구를 하는 경우들이 제기되고 있다. 환자와 환자와의 관계와 환자가족과의 관계에서도 여러 가지 윤리문제가 발생 할 수 있지만, 전형적인 것으로는 대리모와 관련된 문제와 환자의 유산상속과 관련된 이해가 진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삶과 죽음과 관련된 윤리문제

삶과 죽음과 관련된 윤리문제의 대부분은 과거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었으나, 최근 의학적인 지식과 기술의 발전으로 의료에서 전보다 많은 능력을 갖게 됨에 따라 발생하는 윤리문제들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삶과 죽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윤리적인 과제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① 기형이 아주 심한 아기가 출생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② 사고로 크게 다쳐 불구가 되었거나 또는 회복할 수 없는 질환에 이환된 젊은이가 삶 을 포기 하려고 할 때
③ 인공수정 된 난자가 필요 없을 때 그대로 버려도 무방한가?
④ 임신중절을 시행하는 것이 정당한가?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정당한가?
⑤ 뇌사환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뇌사의 의미는?
⑥ 환자가 편안한 죽음을 맞도록 도와주어야 하는가?
⑦ 회복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도 되는가?

다. 의료분배와 관련된 의료윤리문제

의료제도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사람들이 필요할 때 질적으로 우수한 의료를 싸고 쉽게 받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의료자원은 불행하게도 항상 부족하다. 여기에서 부족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부족한 의료자원이라고 하면, 예를 들어 의사, 간호사와 같은 의료 인력의 부족, 병의원, 장비, 기기, 병실, 약품, 이식할 장기 등의 부족을 말한다. 가장 이상적인 분배의 원칙은 아직 찾아내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네 가지 이론이 있다. 공리주의적인 이론, 자유지상 주의적 이론, 공동체주의이론, 그리고 평등주의적 이론 등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평등주의적 이론은 사회정의로 표현되고 있다. 선택의 자유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주의는 자유시장 정의로도 표현하고 있다. 지난 시대에 이 두 가지 이념이 정치, 경제, 사회, 의료 모든 분야에서 충돌을 빚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의 이념보다는 두 이념을 보완하는 중용에서 이상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5. 의료윤리문제에 접근하는 방법

의료윤리문제를 접근하는 방법에는 연역주의(演繹主義) 모델과 귀납주의(歸納主義) 모델 두 가지가 있다.

가. 연역주의 모델

초창기 생명의료 윤리학자들은 선행하는 그 무엇을 윤리이론으로 보고 특정의 의료윤리이론을 생명공학과 의학이 제기하는 도덕문제에 적용시켜 그 답을 연역적으로 도출하는 연역주의 방법을 채택하였다. 이해의 편의를 돕기 위해 다음의 논증을 살펴보자.

인간존재를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그르다.
안락사는 인간존재를 죽이는 것이다.
따라서 안락사는 도덕적으로 그르다.

이런 연역 주의적 모델은 논리학의 삼단논법과 유사하다. 즉, 하나의 도덕원리 내지 도덕이론을 대전제로 받아들인 다음, 이를 우리가 처한 도덕문제에 적용시켜 도덕적인 해결책을 추론해낸다. 이러한 추론방법은 인간의 실천적 행동과 연관된 삼단논법이라는 의미에서 실천적 삼단논법(practical-syllogism)이라 한다. 그래서 공리주의 윤리설, 칸트주의 윤리설, 로스의 조건부적 의무론 등을 구체적인 생명의료 물음에 적용시켜 그 도덕적 해답을 얻고자하는 시도가 많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법은 생명의료윤리 물음을 다루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좀더 분석적으로 천착해보면, 연역적인 방법을 도덕이론의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 우선 안락사 논쟁의 참여자들은 어느 도덕이론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의견을 달리한다. 안락사 반대자들은 위의 경우처럼 칸트적인 의무론을 채택하고자 하는 반면, 안락사 찬성자들은 공리주의 윤리설을 대전제로 채택할 것을 주장할 것이다. 합의가 쉽게 이루어진다면 생명의료윤리 학자들은 단지 원리를 사례에 적용시키는 도덕 판단의 중개인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반면에 도덕이론에 대한 합의가 없는 경우에는 전혀 구체적인 도덕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설령 대전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생명의료윤리에서는 소전제가 하나의 도덕적 물음이다. 즉 대전제가 적용되자면 소전제에 해당하는 사실이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하는데, 소전제 자체가 도덕적 물음이기 때문에, 대전제에 해당되는 도덕원리를 적용시키기 어렵다 . 위의 예에서, 뇌사 상태의 인간을 안락사 시킨다고 해보자. 그러면 뇌사상태의 인간도 생명권을 지닌다고 할 수 있는가? 이는 곧 죽음의 기준에 관한 뇌사와 심폐사 논쟁을 야기할 것이다. 따라서 연역주의 접근방법은 이런 물음을 다룰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다고 하겠다.

나. 귀납주의 모델

원리를 도덕문제에 적용시키는 이러한 하향적 방법과는 달리, 의료 종사자들은 도덕문제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귀납적으로 도덕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이 방법은 구체적인 도덕문제에서 일반적인 도덕원리로 나아가는 상향식 방법이다. 이는 생명의료윤리학이 근본적으로 기존의 윤리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도덕문제를 낳기에, 구체적인 사례분석을 통해 사례들을 유형화시켜 하나의 윤리적 입장을 얻어내고자 시도한 것이다. 예를 들어 구체적인 안락사 사례들을 하나하나 분석하여 그로부터 안락사를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 다음 그 각각에 대해 하나의 윤리적 입장을 얻고자 시도한다면, 이는 바로 귀납 주의적 접근방법이 되는 것이다. 귀납 주의적 접근법의 대표가 바로 사례중심 접근법(casuistry)이다. 이 접근방법은 어떤 도덕문제가 주어질 경우 그와 유사한 패러다임 사례를 토대로 하여 유비추론을 이용해 도덕적 해결책을 찾는 방법을 말한다. 그래서 이 방법에 따르면, 먼저 주어진 사례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요구된다. 그다음 그 사례와 가장 유사한 패러다임을 사례를 선별하여 이 법이 효율적으로 적용되자면,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이 전제되어야 한다.

① 주어진 사례를 정확하게 분석하여야 한다.
② 패러다임 사례들이 미리 확립되어야 한다.
③ 가장 적합한 패러다임 사례를 선별해야 한다.

이 방법은 도덕문제가 발생하는 구체적인 맥락을 고려하기에 현실적인 답을 줄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하지만 이 방법은 생명의료윤리학자 개인의 판단에 상당히 의존하게 된다. 즉 위에서 ①과②를 처리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사례중심 접근법에서는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윤리학자 자신의 실천적 지혜에 좌우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 방법의 성패는 패러다임 사례의 존재에 달려 있는데, 현재 생명의료윤리학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바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확립하는 문제이다. 한 예로서, 안락사는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가의 물음과 같은 패러다임 사례에 대한 확고한 입장이 마련되어 있다면, 이를 근거로 주체적인 삶에서 제기되는 복잡한 상황의 안락사 물음을 유비추론에 따라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패러다임적인 안락사 자체에 대한 도덕적 허용가능성 물음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사례중심 접근법은 적용되기 어렵다. 한마디로 말해, 사례중심 접근법은 개별사례를 다루는 방법이지, 패러다임에 해당되는 일반적인 도덕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부적합하다고 하겠다. 더구나 생명의료윤리학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생명권의 당사자가 누구인가 하는 도덕적 지위 물음과 같은 보편적인 물음을 이 방법은 다루기 어렵다.

6. 우리나라 의료윤리 교육의 역사와 발전방향

우리나라에는 서양의학이 도입되기 오래 전부터 전통의학이 존재해왔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의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의료윤리문제가 제기되어왔으며 우리나라 전통의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의사들에게 요구하는 의료윤리관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술(仁術)’이다. 따라서 바람직한 의사상은 인술을 베푸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전통의학에서 강조하는 인술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인술을 한마디로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한글사전에 의하면 “사람을 살리는 어진 기술”이라고 했다. 여기서 ‘어질다’란 말은 순수한 우리말로 “마음이 착하고, 너그럽고, 그리고 인정이 많다”는 뜻을 포괄하는 것이다. 즉, 의술을 베푸는 의사는 마음이 착해야 하고, 너그러워야 하며, 또한 인정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술을 요즘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사랑이 깃든 의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착하고, 너그러우며 인정이 많은 의사는 환자에게 해롭거나 불리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선한 일만을 할 것이다. 의술을 상업적으로 또는 수입을 목적으로 이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날 의료윤리에서 이야기하는 바람직한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술사상은 의료윤리관이 되어 의학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의술을 배우기에 앞서 이 인술에 대한 윤리적 정신을 함양시켰다. 그러나 근대 서양의료체계가 도입되면서 전통적 의료윤리의 인술사상이 점차 사그라져 갔다.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은 주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하여 도입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극도로 낙후하고 생활환경이 열악한 우리나라에 들어와 병원을 짓고 진료를 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을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초기 서양 선교사들이 설립한 의과대학이나 병원에서 교육받은 우리나라 의사들은 기독교적 사랑을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의 표본으로 하였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전통의학이 서양의 의료체제로 바뀌었다 하더라도 초기의 의료에서는 전통적 인술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예수의 사랑의 정신이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 건강보험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진료에서 진료비의 문제는 전보다 비중이 낮아지게 되었고, 1979년에는 건강보험이 전 국민으로 확대됨에 따라 무료진료의 필요성이 크게 낮아지게 되어 그 후로 인술이란 용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건강보험의 확대로 의료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했지만 그 의료수요를 담당할 의료 인력과 의료기관등의 의료자원은 그간 크게 부족하여 의료인들은 그간 유지해온 특권의식과 권위의식에 대한 반성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성장과 교육수준의 향상으로 국민들에게 인권의식과 시민의식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권의식과 시민의식의 발전에 따라 의료를 하나의 권리로 인식하게 되었고 의료기관이나 의사들에게서 받는 불친절, 불편,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하였다. 병원에서의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게 됨에 따라 병의원이나 의사들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크게 악화 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의료계와 의학교육계 자체에서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게 되었고 의과대학생들에게 의료윤리교육을 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우리나라 의과대학에서는 의료윤리학을 정식으로 교과과정에 넣어 강의를 하게 되었으며 현재 41개 의과대학에서 37개 대학이 의료윤리를 정규과목으로 개설하고 있으며, 4개 대학도 특강이나 통합강의 형식으로 모두 의료윤리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의과대학에서는 11개 대학 중 2~3개 대학만이 의료윤리를 정공필수 또는 선택과목으로 개설하고 나머지 대학에서는 전혀 강의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또한 의과 대학에서는 외국에서 의료윤리학을 정식으로 전공한 여러 윤리학자들의 도움으로 1997년에는 한국의료윤리 교육학회를 창립하고 이어 의과대학에서의 의료윤리 교육과정을 수립하여 각 의과대학에서의 의료윤리 교육을 권장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우리나라 의과대학 의료윤리교육이 빠른 발전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한의과대학에서는 의료윤리가 원전교육이나 의사학을 통해 ‘인술’ ․ ‘보은’ ․ ‘음덕’ ․ ‘자비’ 등의 유불도의 사상을 문헌적으로 살펴보는데 국한 되었다.
따라서 21세기 한국의료윤리학은 동양의 전통적 사상을 재인식하고 새로이 인식된 바탕위에 서양 전통윤리사상을 조화시켜 현대 과학기술 및 생명공학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생명의료윤리를 해결할 수 있는데 이바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한국윤리학계는 동서윤리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숙지하여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의료윤리학’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김상득, 『생명의료윤리학』, 철학과 현실, 2000.
김일순, N.포션, 『새롭게 알아야 할 의료윤리』, 현암사, 1993.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교육 연수원편, 『임상윤리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한국의료윤리 교육학회편, 『의료윤리학』, 계축문화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