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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빈은 정치순 할아버지를 1984년 여름에 처음 뵈었다. 그 해에 나는 서울의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3월부터 몸이 좋지 않았으나, 감기려니 하고 어쩌다 한번 판콜 에이 같은 거나 사 먹고 그냥 견뎠다. 방학이 되어서도 병원에 가기는 커녕 한라산으로 덕유산으로 비맞으며 놀러 다녔다. 7월 말에 병원에 갔더니 (의사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왜 이제사 왔느냐"고 했다. 흔히 '열병'이라고 하는 의사장티푸스였다. 살모넬라 균에 의한 감염이다. 병 자체는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었으나, 너무 오래 묵혀 둔 것은 문제가 되었다.
보통 14일이면 치료가 된다는 병의 치료에 한 달을 바치고서도 호전이 되지 않았다. 2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야 했다. 어머니께서 소문을 듣고 정치순 할아버지의 한약방에 데려가셨다. 바로 집 앞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 구석 앉은뱅이 책상 앞에 할아버지가 앉아계시고, 환자들은 방에 빙 둘러 앉아 있다. 차례가 되면 할아버지께 가 손목을 내민다. 맥진을 하시는데 어찌나 꼼꼼히 하시는지. 묻는 것은 성명, 생년월일, 주소. 병증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왼손, 오른손을 한참 동안 짚고 나서, 진료 노트에 기록을 하신다. 간심비폐, **** 해서 좌우에 4가지 씩 항목이 있는데, 거기에 사선으로 작대기를 하나씩 그리고, 거기에 작은 작대기를 엇그어 '점수'를 매기시는 것 같다. 다시 한번 왼손, 오른손을 짚고 (이번에는 잠깐잠깐) 아까 그었던 작대기를 약간씩 수정한다. 그러고 나서 증세에 대해 말씀하신다. 어디는 어떻고, 어디는 어떻고. 그리고는 메모지를 한 장 내어주고 "받아 적으시오." 하신다. <먹지 말아야 할 음식>과 <먹어야 할 음식>이다. 이를테면, 돼지고기, 가루음식, 된장국은 먹지 말고, 쇠고기 하루에 반 근씩 꼭 먹을 것. 이런 식이다. 먹어야 하고 먹어선 안 되는 음식의 종류는, 물론 환자에 따라서 다르다.
그러면 진료는 끝난다. 약은 거의 안 주신다. "꼭 이렇게 잘 먹고, 한달 후에 오시오." 하고 환자를 보낸다. 환자는, 앉은뱅이 책상 옆의 귀퉁이에 '성의껏' 진료비를 놓고 간다. 천원, 삼천원. 간혹 넥타이 맨 아저씨들은 만원을 놓고 가기도 하지만, 그런 분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3대인가 4대째 가업으로 내려오는 한의사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님과 아버님께로부터 의학을 익혔다. 젊었을 때 환자가 어찌나 많은지 일일이 진맥을 할 수가 없어, 증세가 비슷한 환자들끼리 그룹별로 분류해서 '단체' 진단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도 힘이 들어, 문을 걸어잠그고 금강산으로 '도피'를 하셨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한 달 가량 편안하게 유람을 다니다가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상들에게 배운 이 기술이 병들고 불쌍한 사람들 낫게 하라는 것인데, 나만 편하자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그날로 돌아와 그 자리에서 평생 환자를 보았다.
할아버지께서 나의 맥을 보시더니 메모지에 볼펜으로 한문을 써 주셨다.
사십대독천황씨(四十大讀天皇氏)
남촌북촌개아소(南村北村皆我笑)
"천황씨는 옛날의 성인이시다. 이분이 평생 농사를 짓다가 나이 마흔이 되어서 글을 크게 읽기 시작했단다. 사람들이 다 비웃었지. 그래서 '남쪽마을 북쪽마을 사람들이 다 나를 보고 웃는다'고 한 것이란다."고 설명해 주셨다. 무슨 뜻이신지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공부할 수 있는 몸이 아니다. 책을 읽고 책장을 넘기면 바로 앞 장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머릿 속이 새하얄 것이다. (실제로 그랬었다.) 이 나이에 1, 2년 늦어지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 휴학하고 좀 쉬라는 말씀이셨다.
나는 몸이 좋지는 않았지만, 휴학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한 달 입원 치료까지 받지 않았는가? 좀 다니다보면 좋아질거다.
2학기가 시작되었는데, 그러나 한 달을 견디지 못했다. 휴학하고 집에 내려왔다. 할아버지께 종종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꾸준히 다니지는 못한 것 같다. 좀 좋아지니까 휴학생의 즐거움을 찾으러 여기저기 다니느라고. 아마 매일 반 근 씩의 쇠고기도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꾸준히 다녔더라면 일찍이 건강 문제를 해결보았을텐데...)
환자들은 어디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지, 광주, 여수, 전주... 전남북 일대에서는 오는 것 같았다. 특별한 병이 없는 환자들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이곳 저곳 다 다녔지만 해결을 보지 못한 환자들이었다.
여간해서는 약을 주시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신 적이 있다.: "약이란 채소에 주는 거름과 같다. 식물이 실할 때에는 거름을 주면 더 잘 자라지만, 약할 때 거름을 주면 오히려 말라 죽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식이요법을 하고 몇 차례 걸음을 한 끝에 어느 정도 몸이 되어야만 합격을 하고 약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그 약의 기운을 받는 날을 택일 해서 짓는다고 하셨다.
매일 진료를 마치고 나면, 당신의 맥을 짚어보신다고 했다. "오늘도 이만큼 기운이 감했구나."(아마 피가 보탔다는 표현을 하신 것 같다.) 그만큼 할아버지의 맥진법은 정확한 반면 의사 스스로에게는 기혈의 소진을 초래하는 방법인 듯하다.
한번은 손을 보여주셨다. "자 한번 봐봐라." 오른손과 왼손을 나란히 폈는데, 맥진을 하는 오른손은 심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뼈가 휘어서 오목하게 되었다. 오그라들어 있었다는 게 정확하겠다. 평생 진맥을 한 수고 끝에 남은, 영광의 훈장이라기엔 가슴아픈 손.
정치순 할아버지와의 만남으로 나는 한의학과 만났으며, 서양의학의 눈부신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에 대해선 한의학이 더 제대로 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인연의 끈으로 학생 시절에는 침도 배웠고, 이제 시간의 수레바퀴가 몇 번 굴러 한의학을 제대로 알아보겠다고까지 하게 되었다.
정성빈은 1997년에 지방 근무를 목포에서 하게 된다. 당연히 할아버지를 찾아뵈었다. 환자를 보지 않고 쉬는 날이라고 하셨다. 조그마한 마당에서 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계셨다. 나를 알아보지는 못하셨다. 그 동안 십 몇년이 지났으니까. 인사드리고, 언제 다녀갔던 누구라고 말씀드리고.
"내가 작년에 뇌출혈(?)을 맞아가지고, 아조 영금을 봤어.(심하게 고생했다는 뜻) 그래도 배운 것이 이것이라 겨우 살려는 놨제." 그러셨던 것이다. 그래도 환자들은 찾아오고, 체력을 고려해서 일주일에 2~3일은 쉬신다고 하셨다.
다음에 꼭 오겠다고 인사드리고는 다시 찾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데일리 프로그램에, 이런 저런 촬영 출장에, 요컨대 잡다한 일상의 의무를 다하느라 정작 중요한 만남은 밀쳐버리고 만 것이다.
정성빈이 주제넘게 한의학을 공부해보겠다고 회사를 때려치운 지 얼마 안 되어, 옛날에 보던 문고판 책갈피 속에서 저 쪽지를 발견한다. 사십대독천황씨, 남촌북촌개아소... 나이 마흔이 다 되어서 직장 집어치우고 공부하겠다는 정성빈. 격려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비웃는 사람도 당연히 많았던 선택.
아아, 할아버지는 나의 인생을 꿰뚫어 보셨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