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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3월20일) 광화문 촛불 집회에 참가했다. 20만이 모였다는 자리,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느긋하게 빈 자리를 찾아 걸어갔다. 양초를 나눠주거나, <너흰 아니야> 씨디를 파는 자원봉사자들이,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조용히 오갔다. "탄핵 무효!" 하고 크게 외치는 어린이 목소리가 들려서 보니 3~4학년으로 보이는 아이였다. 고딩, 중딩, 초딩에 더 어린 아이들까지 아주 많았다.

연인이나 부부로 보이는 젊은 커플들. 주최측에서 나누어 준 '탄핵 무효' 스티커를 등에 붙이거나 머리에 두른 사람들. 그리고 그 와중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 라고 외치는 아저씨.

코리아나 호텔 앞. 광화문 사거리의 연단이 저 앞으로 보이고, 뒤쪽으로는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게 많았다. 택시기사가 대통령보다 똑똑한 나라.(적어도 YS때까지는 그랬음) 위정자들이 망쳐놓으면 백성들이 호미 들고 지켰던 유구한 전통의 이 나라에서 또 한번 열린 국중대회.

월드컵과 여중생 집회를 통해서 터득한 지혜일까. 대열 안에서 오고 감에 전혀 불편함이 없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았지만 아늑함마저 느낄 정도였다. 적당한 거리마다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도록 간격을 두었고, 앞뒤 간격도 너무 밀착되지 않게, 고도로 설계해 놓은 공간처럼 느껴졌다.

노래패와 가수들이 나오고, 연사들이 나와 연설을 했지만, 80년대 정치집회의 격앙되고 경직된 분위기와는 너무 달랐다.

비슷한 것 같지만 달랐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시민의 의식이 이만큼 성숙했구나, 하는 점이 피부로 느껴졌다. 시간이 무심히 흘러간 것 같지만, 그 사이에 진화라고 할 만한 것이 일어나고 있었던 모양이다.

87년 6월에도 나는 비슷한 공간에 서 있었다. 서울시청 앞 광장, 회현 고가 위에서 대학생들이 돌을 집어 던지고, 최루탄 맞은 시민들이 분수대에서 세수를 했다. 서소문 중앙일보 건물 옆, 어떻게 하다보니 군중에서 떨어져나온 우리들 이삼십 명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와 사과탄을 던지던 전경의 이 악문 표정이 생각난다. 빌딩 사무실에서 종잇장을 집어 던지며 구호를 외치던 와이셔츠 차림의 아저씨들. 보라색 머플러들 두르셨던가, 김민석 어머니, 김세진 어머니 들. 그 덥던 날. 사과탄, 지랄탄, 페퍼포그가 안개처럼 뿌옇던 날.

87년의 경험은 소중하지만, 아직 결여하고 있었던 그 무엇이 올 봄에 채워지는 듯하다. 우리는 계속 민주를 이야기했지만, 정말로 시민이 주인이라는 명제를 스스로 깊이 긍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물을 찾고, 지도자를 찾고, 전위(뱅가드)니 수령이니 하면서 누군가 이끌어갈 사람을 찾았다. 날잡아 기껏 투표하면, 모셔야 할 높으신분을 뽑을 뿐인 대의제 민주주의의 실상(또는 허상)에 대해 깊이있게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12일에 식당에서 점심 먹다가 탄핵 결의 생중계를 보면서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편으론 '저것들 자멸하는군' 하는 판단이 들었다. 집에 오는 길에 라디오로 들은 뉴스 현장음: "(울먹이는 아니 거의 울부짖는 시민) 어떻게 뽑은 대통령인데~ 어떻게 뽑은 대통령인데..." 울컥, 속에서 올라왔다. 하지만 역시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그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일이 일어났을까? 진정 이 나라는 천운이 함께 하는 것인가? 어떻게 이렇게 쓰레기들이 자진해서 쓰레기장으로 가 버리는 일이 생겨났을까? 기독교인 식으로라면 할렐루야! 할 일.

욕심이 눈을 가림이 이와 같다. 돌대가리가 아닌 이상 어떻게 저런 판단을? 亢龍有悔가 다이나믹하게 펼쳐지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목도하고 있다.

축복스럽기는, 쓰레기가 사라지는 일 뿐만이 아니다. 집회 자리에서, 사람들이, 포근하게 일렁이는 촛불을 들고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부르는 게 내 눈에는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촛농이 튀는 줄도 모르고 즐겁고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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